사무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살인사건이 났어. 지금 현장으로!”
자, 출동이다.
1. 출동할 때 챙기는 것들
과수팀: 과학수사 장비들. 또 뭐가 더 필요한가? 총? 죽은 사람을 만날 때는 필요하지 않다. ‘간지’패션? 우리에겐 ‘과학수사 조끼’가 있다!
* <공공의 적> 강철중은 말한다, “교통경찰한테 실탄 주는 거 봤어?” (게다가 과수팀은 형사도 아니기 때문에 총을 소지하지도 않는다.) |
2. 현장에 도착하면
과수팀: 일단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입는 것 같은 방염복을 입는다. 현장증거를 보존하는 동시에 현장의 부패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마스크에 덧신도 필수다. 입고 나서 10분만 지나면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검시관도 중무장한 채로 시체를 살펴보고 있다. 장갑 안도 땀으로 흥건하다.
* 현장 바닥의 혈흔, 발자국, 머리카락 등 미세증거(눈에 보이지 않는 물적 증거)의 훼손을 막기 위해 통행 판이라고 부르는 플라스틱 징검다리를 보폭 간격으로 놓는다. 각각의 증거들 옆에는 노란 숫자판을 놓고 사진을 찍는다. |
3. 형사들과의 팀워크
과수팀: 과학수사는 어디까지나 수사를 돕는 수단일 뿐. 채증에는 담당형사의 입김이 작용할 때도 있다. 범인을 잡는 것은 형사다. 주인공은 우리가 아닌 것이다. 메딕이 럴커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지.
4. 증거수집
5. 사무실로 돌아오면
과수팀: 과학수사요원이라면 수륙양용은 되어야지. 방호복 벗자마자 실험 들어간다. 운 좋으면 야식먹고 할 수도 있다. 대개는 담당형사가 저녁을 쏜다. 다른 사람은 현장 상태와 증거물에 대한 보고서를 쓴다.
6. 시체 곁에서 수거한 칼을 검사한다. 손잡이에서 지문이 나올까?
과수팀: 조용한 가운데 지문을 채취하고 AFIS에 넣는다. 몇 십 개의 유사지문이 뜨면 일일이 대조한다. 컴퓨터는 범위만 좁혀줄 뿐이다. 가려내는 것은 숙련된 요원의 눈.
* 보통 지문 채취, 하면 붓으로 분말을 바르는 분말 채취법을 연상하기 쉽다. 또 분말 채취법, 하면 검은색 분말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분말도 채취하려는 지문의 특성에 따라 그 종류와 색상이 달라진다(형광색도 있다). 분말을 이용한 채취를 할 때는 신문지를 펴고 그 위에 분말을 아주 조금 덜어낸 다음 전용 붓으로 둥글둥글 굴려준다. 정전기 현상을 일으킨 붓에 고운 분말을 최대한 얇게 입히기 위해서다. 분말이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들이마시게 되는데, 성분에 중금속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건강에 좋을 리 없다(얼마 전엔 과학수사요원의 암 발생에 대한 기사도 나왔다). |
7. DNA 샘플 간 비교가 들어간다
과수팀: 국과수로 보낸다. 일거리가 밀리면 회신이 늦어지는 건 다반사다. 담당형사가 독촉해도 할 수 없다.
8. 현장증거가 분석되는 동안
과수팀: 결과가 나오는 대로 담당형사에게 알려준다. 담당형사는 탐문 수사하느라 바쁘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엔 북한군이 막고 있어. 뛰어봐야 벼룩이지.” <와일드 카드>에 나온 대사다. 말마따나 언젠가는 잡힌다.
9. 범인의 윤곽이 잡혔다!
과수팀: 이미 담당형사가 잡아서 진술조서 꾸미고 있다(어쨌든 다 잡힌다. 삼면이 바다 어쩌고 I). 우리 임무는 이미 끝났다. 보고서 마무리하고 또 다른 현장으로 나간다.
(주의사항: 그리섬 반장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갖겠다고 까칠하게 굴다간 바로 전출이다.)
10. CCTV에 범인이 찍혔다!
과수팀: CCTV는 TV다. 저화질 영상을 줌인하면 ‘보다 더 저화질’이 된다. 흐릿한 얼굴이라도 나오면 다행이다. 신기한 거는 그런 얼굴이라도 잡아내면 언젠가는 잡힌다는 거다(역시, 삼면이 바다 어쩌고 II).
11. 일반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미국에서도 ‘CSI’ 방영 이후 과학수사가 만능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실제 수사진들이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CSI 신드롬’(배심원들이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으면 유죄를 선고하지 않는 현상)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까. 미국 쪽이 시설이나 장비가 좀더 좋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미국 CSI나 한국과학수사팀이나 사정은 비슷하다. 그런데 인터넷 뉴스에 이슈가 될 만한 강력사건 소식이 올라오면 밑에 달리는 리플들은 보통 ‘CSI한테 맡겨야 한다’라거나, ‘우리나라는 미국 따라가려면 멀었다’라거나, ‘우리나라가 과학수사를 하기는 하냐’는 것 같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마다 현장 요원으로서 속상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한국의 과학수사팀은 지문 채취와 그를 통한 신원 파악에 있어서는 세계 1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라화된 시체의 손가락 끝을 끓는물에 넣어 불린 뒤 지문을 떠낸다거나, 익사한 사람의 불어터진 손가락 가죽을 벗겨내고 골무처럼 끼고 지문을 뜬다거나 하는 일은 한국 과학수사팀밖에 하지 못한다(작년 쓰나미 사태 때 실종자들의 신원 파악은 우리나라가 1등이었다. 다른 선진국의 조사팀들이 견학을 올 정도였다). 이런 얘기들이 어쩌면 역겹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죽은 이가 누구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들으려 하는 게 과학수사팀의 자세일 것이다.
과학수사는 완전범죄를 방지하고 사회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지원사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CSI는 브라운관 안에서 멋진 폼으로 총 들고 범인을 직접 쫓고 있을 테지만, 현실의 한국 과학수사팀은 경찰의 일원으로서 수많은 치안활동 중 하나로 감식작업을 하고 있다. 전자는 환상이고, 후자는 현실이다. 환상은 달콤하지만 덧없고 현실은 씁쓸하고 잔인하지만 그게 삶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과학수사요원들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정의실현을 위한 증거 수집을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글: 아모이
경상도 모처에서 활동 중인 새내기 과학수사요원. ‘CSI’ 팬이지만 그 이유는 드라마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워릭의 섹시한 입술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의욕만땅의 신참 경장. (현직 경찰의 경우 신분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실명과 얼굴, 소속은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불 필명으로 대체했습니다. / 편집자)